RnR과 책임

RnR을 정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입사 전, CFO인 YS께서 방향성을 정하는 데 RnR 정리가 필요하다고 요청하셨다. 나는 그때 RnR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다. 그냥 “기획은 누가 하고, 개발은 누가 할 거예요” 같은 이야기만 했다. 리서치 한 번이라도 했으면 뭐라도 나왔을 텐데. 게으른 나에게 반성한다.

그럼에도 YS께서는 너그럽게 넘어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RnR이란 결국 어떤 업무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히 해달라는 거예요.”

“책임”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

책임. 굉장히 무섭게 느껴지는 표현이다.

나는 팀장으로서 프로젝트 로드맵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책임을 진다는 건 뭘까? 이게 망하면 내가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걸까?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두렵기 마련이다.

나는 별로 두렵지 않은 척했지만, 팀원들은 솔직했다. 권한과 책임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인사팀의 Jun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Jun이 알려준 RnR의 본질

Jun은 이렇게 말했다.

“RnR을 정하면서 대뜸 ‘책임지라’고 하니까 겁이 나는 거 이해해요. 하지만 책임이라는 게 여러분이 생각하는 ‘문제 생기면 네가 해결해’와는 달라요.”

그리고 핵심을 짚어줬다.

“RnR은 조직이 더 가볍게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거예요. 무슨 일을 해야 할 때 ‘누가 하지?’, ‘시간 나는 사람?’, ‘일단 제가 받을게요’ 같은 혼란에 빠지는 걸 방지하려고 정하는 거죠.”

이 말을 듣고 나니 RnR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책임은 “잘못되면 벌 받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은 여기로 가면 된다”는 명확함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 팀에 RnR이 필요했던 이유

스타트업에서 한 사람이 여러 업무를 맡는 건 당연하다. 인력이 적기도 하고, 깊은 전문성이 필요 없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 팀도 마찬가지였다. 디자인 전공으로 UX/UI 디자이너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기획도 하고 잡무도 처리하는 팀원이 있었다. 심지어 한 명은 다른 팀 외주 업무까지 떠안고 있었다.

팀원들의 불만도 여기서 나왔다. “자꾸 이런저런 일 던지는데 전문성도 안 쌓이고 헤매게 된다.”

지시하는 입장에서도, 받는 입장에서도 RnR 정리가 필요했다.

우리가 정한 방식

먼저 개발 프로세스 자체를 정의했다.

  1. 가설 수립
  2. 기획서 작성
  3. 기획서 검토
  4. UI/UX 디자인
  5. 개발
  6. 유저 피드백
  7. 가설 검토

그리고 각 단계별로 책임자를 명확히 했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업무가 어떻게 돌아갈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돌기 시작했다. “기획서 검토 요청이 오면 이사진한테 바로 가면 되고, 디자인 이슈는 저 분한테 물어보면 되는구나.” 이전처럼 눈치 보며 시간 쓸 일이 줄어든 것이다.

앞으로 남은 것

아무리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하더라도, 해당 업무의 책임자는 정해두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이번 미팅은 그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물론 실제로 일을 하다 보면 예상대로 안 돌아갈 거다. 그건 안다. 그래도 일단 기준이 생겼으니 열심히 해봐야겠다.

그리고 과중한 업무를 맡게 된 팀원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게 없다. 나중에 밥 한번 살게요.


2026-02-01